문종 (조선의 제 5대 왕)

2020. 3. 19. 23:01역사공부/조선왕조실록

재위 1450년(문종 즉위년)∼1452년(문종 2).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향(), 자는 휘지(). 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비는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인 현덕왕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각종 질환으로 인해 1437년 일찌감치 세자(문종)에게 서무()를 결재하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 첨사()·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를 받게 했고(),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했으며, 1445년부터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문종은 즉위하기 전부터 실제적인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 시대의 정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해 약간 위축되었다. 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종친 세력의 심상하지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한 언관(: )의 종친에 대한 탄핵 언론으로 상호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 언관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왕의 호불적() 경향에 대한 유신()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각종 불교 행사와 내불당()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유자적()인 언관()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언관의 언론은 왕권이나 그 밖의 세력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했고, 언로()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 6품 이상에게 모두 윤대()를 허락하였다. 또한 비록 벼슬이 낮은 신하일지라도 부드럽게 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문종 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고려사()』·『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 등이 있다. 『고려사()』는 정도전() 등의 『고려국사()』 이래 여러 차례 개수()·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 김종서()·정인지() 등에게 개찬()을 명해 1451년(문종 1)에 완성을 본 것이다.

 

또한 기전체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 왕조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문화의 정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1445년에 10사()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하였다. 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제시했고, 재위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문종은 유학(: )뿐 아니라 천문()과 역수() 및 산술()에도 정통했고, 예()·초()·해서()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 재위 2년 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 사육신 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이고, 묘호는 문종()이며, 능호는 현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학자 군주 문종, 재위 2년 만에 죽음을 맞다

문종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최초의 장자 계승을 한 정통성 있는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신중하고 끈기 있는 왕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세종에 대해선 알아도 문종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문종을 아는 사람들도 ‘빨리 죽은 왕 아니야?’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건 문종이 세자로 지낸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세자였거든요.

 

문종대왕 태실비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착실하게 세자 수업도 받았던 문종은 아주 잘 준비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위 2년 만에 종기가 재발해서 죽게 되죠. 그때 그의 나이 39살이었습니다. 문제는 나이 어린 세자(단종)였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아직 결혼 전이라 부인도 처가도 없는 혈혈단신의 세자. 12살이던 단종이 그렇게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종 - 뛰어난 자질과 정통성을 모두 갖추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이다지)

[네이버 지식백과] 문종 [文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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